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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초등생 아들과 한자 배우는 판사 엄마|

[삶과 문화] 초등생 아들과 한자 배우는 판사 엄마

한국일보 2015.07.01


내가 속한 인문학 공동체에 기초 한자를 가르치는 서당이 생겼다. 갑골문을 연구한 60대 선생이 갑골문 해설을 통해 한자를 가르치는

강좌다. 사서삼경이나 ‘주역’, 제자백가, 당시(唐詩) 등의 한문 강좌는 있었지만 기초 한자를 가르치는 모임은 없었다.

선생도 처음부터 선생이 아니었다. 공동체에 개설된 산스크리트어 강좌에 왔다가 내게 발목을 잡혀 선생이 된 사람이다. 공동체에 오기 전 진도와 함양 등지에서 한자 서당을 열고 관련 책까지 냈다는 소문을 뒤늦게 전해 듣고 공동체에서도 한자를 가르쳐달라고 청한 것이다. 갑골문 한자 해설을 따라가는 단 12차례의 강의로 2,700여 상용 한자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하니 이 한자 선생, 귀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배우러 왔다가 가르치는 사람은 한자 선생뿐 아니다.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선생은 스피노자 강의를 들으러 왔다가 프랑스어 전문가임이 알려져 선생으로 붙잡혔고, 독일어를 가르치는 선생은 라틴어를 공부하러 왔다가 선생이 됐다. 문학과 번역 강의를 맡고 있는 한 대학 교수는 라틴어와 ‘계몽의 변증법’ 강독 시간엔 학생으로 변신하고 지젝 강의를 들으러 왔던 건축가는 ‘내가 꿈꾸는 집’이라는 이름의 건축학교를 열기도 했다.

한자 서당에서 선생보다 재미있는 건 공부하는 학동들이다. 중학생, 대학생이 있는가 하면 국내외 유명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연구자도 있다. 작가, 교사가 있는가 하면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현직 대학교수도 있다. 기말고사가 끝나는 대로 고등학생도 몇몇 합류한다.

더 재미있는 건 아이와 함께 하는 갑골문 한자반이다. 강의의 제목에 아예 ‘아이와 함께’리는 말을 붙인 이 공부 모임에서는 대학교수 아버지가 중학생 아들과, 판사 엄마가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한자를 배운다. 대학교수나 법조인 부모라고 해서 아이보다 공부를 더 잘하는 것도 아니다. 강의를 하며 수시로 테스트를 하는데 대부분 아이의 점수가 부모의 점수보다 낫다. 필체도 어른보다 아이가 낫다. 하지만 놀라운 건 고등교육을 받은 부모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아니다. 대학교수와 법조인, 박사의 권위를 버려두고 어린 아이들과 공부하는 이들의 하심(下心)이다.

돌아보면 공동체에 아이와 어른이 나란히 공부하는 풍경은 한자 서당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대 희랍어 반에서는 50대 엄마가 20대 아들과 딸을 데리고 와서 나란히 공부한다. 토요일 열리는 드로잉, 수채화반에서는 초등학생 두 아이와 부모가 모두 그림을 그린다. 휴일 하루 온 가족이 그림을 배우며 함께 하는 셈이다. 그러니 백발이 성성한 노 교수가 20대 초반의 대학생과 함께 강의를 듣거나 세미나를 하는 것은 전혀 낯선 모습이 아니다.

물론 공부에는 유리한 때가 있을 것이다. 나만 하더라도 술과 담배에 찌든 머리의 기억력이 한창 때와는 확연히 다름을 느낀다. 특히 애써 배운 외국어를 방치했다가 불과 몇 달 만에 대부분 잊어버린 것을 보며 절망스러운 느낌도 없지 않다. 한자 반 테스트에서 초등학생, 중학생 아이의 점수가 대학교수 아버지보다 성적이 좋은 것도 이 때문이리라.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공부를 잘못하는 것도 아니다. 기억력과 체력은 좀 떨어지지만 이해력, 종합력은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잡념이 별로 없이 집중하는 힘과 꾸준히 공부하는 항심(恒心)도 나이 든 이들의 장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문학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건 잘하고, 못하고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는 공부는 취업이나 돈벌이를 위한 것이나 남들보다 우위에 서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지평을 넓히는 일종의 수행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가 누구에게 배우느냐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배우러 왔다가 가르치는 이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공부에서 필요한 건 하심과 항심일 뿐, 어른과 아이가 따로 없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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