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연구자료
관련기사

관련기사|

이래 가지고 무슨 소통이 되겠나? - 조선일보 2013.10.31.|

[이한우의 태평로] 이래 가지고 무슨 소통이 되겠나?

조선일보 이한우 여론독자부장 2013.10.31.

 
귀와 눈을 밝게 하고 일과 사람을 잘 알라는 聰·明·睿·知 네 글자
표기 방식 제각각에 읽어도 뜻을 모르니 ‘앎’으로 가는 길 막혀
사회의 知力 약하면 진정한 리더십 안 나와




한글날이 올해부터 공휴일로 부활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그 뜻을 살리지 못한 채 10월을 보내는 것 같아 이달을 보내는 끝자리에 한마디 해둬야 할 것이 있다.

친구 따라 강남은 못 갔지만 어찌어찌해서 아는 사람들 따라다니며 10년 가까이 사서삼경을 중심으로 한문 공부를 하다 보니 요즘 와서 새로이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많다. 그중 하나, 글과 앎, 좀 ‘유식하게’ 말하면 문자(文字)와 지식(知識)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알몸과 나체(裸體), 밥집과 식당(食堂)의 서열 관계가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아 조금은 씁쓸하다. 게다가 누드와 레스토랑은 각각 이 둘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 지적해 둔다.

다시 본론이다. 聰明睿知, 사서의 하나인 ‘중용’에서 말하는, 성군(聖君)이 갖춰야 할 필수 요건 네 가지다. 이 글에 대해 21세기 평균적인 한국인들이 받아들이는 방식은 크게 봐서 세 가지다. 한자(漢字)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총·명·예·지’라고 읽은 다음에 ‘총명은 알겠는데 예지가 뭐지, 미래를 볼 줄 안다는 뜻인가?’ 정도 생각하며 지나간다. 두 번째 유형은 ‘총명하고 예지하여’라고 읽으며 약간의 풀이가 된 듯한 막연한 느낌을 갖고 지나간다. 세 번째 유형은 아예 소리도 못 내보고 그냥 지나간다. 이 유형이 아무래도 잘못된 국어 교육과 인터넷의 영향 등으로 가장 많다. 그리고 첫 번째 유형에는 국한문 혼용론자들이 많고 세 번째 유형에는 한글 전용론자들이 많아 간혹 논쟁도 한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의 철저하지 못한 어문정책으로 인해 서점에 가보면 聰明睿知(총명예지)를 표현하는 방법도 글쓴이나 옮긴이마다 제각각이다. 聰明睿知, 聰明睿知(총명예지), 총명예지(聰明睿知), 총명예지, 聰明하고 睿知하여, 聰明(총명)하고 睿知(예지)하여…. 아직 절반도 열거하지 못했는데 이 지경이다. 이 정도 되면 달랑 같은 한자 넉 자를 읽었지만 서로 소통이 될 리가 없다. 우리와 같은 한자권이지만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보듯 한자 넉 자에 읽는 법은 열 가지, 스무 가지다. 이래 가지고는 글자에서 앎으로의 이동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10년 공부 끝에 알게 된 것이긴 하지만 聰明睿知(총명예지) 이 네 글자는 지금의 시점에서도 지도자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을 말하고 있다.

聰(총), 귀가 밝다는 것이다. 청력이 좋다거나 경청을 잘한다는 뜻이 아니라 아랫사람의 말을 듣는 순간 그 말 속에 섞여 있는 참과 거짓, ‘전문용어’로 진위(眞僞)를 정확히 가려낼 줄 안다는 뜻이다. 明(명), 눈이 밝다는 것이다. 오랜 경험으로 인해 눈앞에 벌어지는 일의 잘잘못을 명확하게 가려낼 줄 안다는 뜻이다. 睿(예), 일에 밝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을 추진하기에 앞서 밑그림을 빈틈없이 그려낼 줄 안다는 뜻이다. 知(지), 사람에 밝다는 것이다. 사람을 깊이 꿰뚫어 보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숨은 능력을 들여다볼 줄 안다는 뜻이다. 이렇게 풀이해야 왜 聰明睿知(총명예지)가 성군(聖君)의 덕목이라 했는지 알게 된다. 즉 글자가 앎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처럼 훌륭한 지도자의 원칙이 주변의 책에 담겨 있었는데도 글자를 맴도느라 앎으로 나아가지 못한 우리 사회의 지력(知力) 때문에 제대로 된 리더십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참, 지력(知力)도 ‘알아내는 힘’으로 옮겨야 뜻이 보다 분명하겠다.

댓글 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수 작성일
380 조선왕조 신드롬의 산실 한국고전번역원에 가보니 어문정책관리자 2482 2015.08.04
379 조상을 알게 하는 한자교육 어문정책관리자 2693 2014.07.15
378 祖父母가 새 부모님? 어문정책관리자 2782 2014.01.20
377 제약업계 이색 공채,면접은 막내사원이..자기소개서는 漢字로.. 어문정책관리자 2783 2014.05.07
376 정주영이 몽구에게 ‘수부수빈 개구소인’ 어문정책관리자 2753 2014.04.15
375 정운찬 전 총리 "입시전문 변질 특목고 원위치시켜야" 어문정책관리자 2650 2014.12.08
374 정보화시대, 동양고전에 길을 묻다 - 서울신문 2013.11.19. 어문정책관리자 2675 2013.12.31
373 전면 漢字 광고 어문정책관리자 2691 2014.07.07
372 잠로영안(暫勞永安) - 잠시 힘들이면 영원히 편안하다 어문정책관리자 2037 2016.05.31
371 잘 모르는 채 쓰고 읽히는 한자들 어문정책관리자 2740 2014.07.22
370 자총연맹 2015년 전국고교생 토론 대전시대회 개최 어문정책관리자 2302 2015.08.05
369 읽고 기록하고 행동하라 어문정책관리자 2187 2016.08.16
368 일본은 '국어' 교과서 통해 한자 교육… 생활 한자 가르친다 어문정책관리자 2699 2014.01.20
367 '인용의 달인' 김수남 검찰총장 어문정책관리자 2142 2016.02.17
366 인명용 한자 유감 - 한경에세이 2013.07.31 어문정책관리자 2800 2013.12.31
365 이한동 "한글전용은 위헌"…어문정책 정상화 추진 - 뉴시스 2012-.. 어문정책관리자 2644 2013.12.31
364 이승만 대통령의 한글 사랑은 대단했다. 어문정책관리자 2744 2013.12.31
363 이름에 쓰이는 한자 5000자에서 8000자로 대폭 확대 어문정책관리자 2658 2014.10.16
362 이름에 못쓰는 한자, 확 줄어든다 어문정책관리자 2712 2014.10.21
이래 가지고 무슨 소통이 되겠나? - 조선일보 2013.10.31. 어문정책관리자 2718 2013.12.31
후원 : (사)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사)한국어문회 한자교육국민운동연합 (사)전통문화연구회 l 사무주관 : (사)전통문화연구회
CopyRight Since 2013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 All Rights Reserved.
110-707. 서울 종로구 낙원동 284-6 낙원빌딩 507호 (전통문화연구회 사무실 내) l 전화 : 02)762.8401 l 전송 : 02)747-0083 l 전자우편 : juntong@juntong.or.kr

CopyRight Since 2001-2011 WEBARTY.COM All Rights RESERVED. / Skin By Webar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