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지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글전용/한자혼용의 논쟁에 한마디 거들고자 한다. 아직 미해결의 이 국민적 문제에 대하여, 앞으로 계속 논쟁이 공개되기를 바란다. 한글전용은 해방 직후 국회에서부터 대두된 화제이기는 했으나 반대 입장도 못지않게 활발하여 실행을 못 보다가, 박정희 정권 때 한글전용파 학자들이 이 문자 혁명을 일으키면 박 대통령이 위대한 혁신가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는 추임새를 넣어 정권의 힘으로 실행된 것으로 안다. 반대하는 쪽에선, 한글 주장파가 권력을 매수한 결과이니, 한자파도 권력을 매수하면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나는 이런 수단을 반대한다. 그래서 관심있는 사람들의 공개 토론이 계속되기를 주장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이치로 설득하기를 바란다.

우리나라에서 학문이라면 의례히 한자 학문이었지, 한자를 “굴레”라 여긴 일이 없다. 무릇 학문과 공부에는 노력이 따를 뿐이다. 한 나라의 문화나, 문명이란 것도 역사의 축적일 뿐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문화, 문명이 다 한자 속에 자라고, 한자로 표현되었으니, 이 사실을 어떡하랴.

민족주체성은 당연한 명제이나, 그렇다고 한글로 한자의 소리만 적고 뜻은 가려버리면, 어떡하나? 서양의 라틴어 문화에서 근세 각자 나랏말로의 전환은 같은 표음문자인 알파벳 안에서의 변화였으니, 우리의 회의문자(會意文字)와 표음문자(表音文字)의 관계와는 경우가 다르다. 그동안 한글전용의 공으로 우리 글에 서양말이 쏟아져 나오고, 뜻을 가리고 소리만 적으니, 문장이 정교하지가 못하고 해독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한글 속에 다른 꼴의 문자인 한자가 섞이니 눈에 잘 띄어 읽기가 빠르지 않겠는가? 우선 인명, 지명, 단체명 같은 것만이라도 일률적으로 한자로 써준다면, 읽기가 얼마나 쉬워질까? 앞으로 토박이 말이 활발히 발굴되어, 어휘를 넓힐 것에 대해서 나는 적극 찬성이다. 한자의 보고(寶庫)를 그냥 두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일본은 패전하여 미군이 소리 위주로 언어 개혁을 하도록 종용했을 때, 우리는 우리 고유의 글 적는 법이 있다고, 그들의 국한혼용을 고집했단다. 이것이 주체성이다. 일본은 표음문자가 두 가지 있어, 하나는 외래어를 적는 데 전용한다(가타카나). 나는 이것이 부럽다. 우리 글에서는 어디까지가 서양말인지, 우리말인지 분간을 못할 때가 있다. 앞으로 서양말을 적을 때, 우리는 한글 꼴에 손질을 하여 형태를 바꿈으로써, 다른 한글과 차별을 해줌이 바람직하다. 한자의 굴레를 벗는 목적이, 서양말의 범람으로 인하여 우리의 주체성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아니었을 것이다. 한자를 우리의 굴레였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잘못이다. 우리의 이름 석자가 다 그 속에 있다. 우리의 학문과 문화가 대부분 그 속에 있다. 유럽의 어느 나라도 그들의 그리스, 로마의 전통을 굴레라고 불평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한자문화가 이제는 전세계에 번져서 사람들이 배우기를 원한다고 한다. 이 마당에 우리는 진정 2000년 공을 헌신짝같이 버리기를 바라는가?

문자와 언어는 남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한 덕목인데, 요즘 열렸던 한·중·일 회담 때, 그 표지막에 한글과 영어만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부끄러웠다. 환영하는 마당에 한글로만 적어, 너와 나의 차이점을 크게 부각시켜야만 했는가? 우리는 세계인이기 이전에 동양인이 아닌가. 우리의 “주체성”에는 이것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최찬식 한국어문회·한자교육연합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