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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어의 현명한 표기 - 경향신문 2013.09.13.|

[사유와 성찰]외래어의 현명한 표기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 문학평론가  경향신문 (2013.09.13.)

이명박 정권이 들어설 때, 한 유명인사가 ‘아륀쥐’ 발언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켰다. 이 발언으로 그는 개인적으로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고, 더 나아가 지식인 사회에서는 새 정부의 문화 · 교육 정책에 대한 우려가 시작되었으며, 알다시피 그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에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젊은 학자가 그 사건을 두고 내게 따지듯 질문을 했다. ‘오렌지’보다는 ‘아륀쥐’가 미국인들의 발음에 더 가까운 것이 사실인데 왜 한국인들이 그 발언을 문제 삼았느냐는 것이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대답을 해 주었지만, 말을 하다보니 그 사건의 당사자도 왜 자신의 ‘지당한 발언’이 비난을 받아야 했는지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는 외래어 정책의 근간과도 연결되기에 외래어와 외국어는 다르다는 상식적인 설명을 새삼스럽더라도 늘어놓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간단히 말해 ‘오렌지’는 한국말이고 ‘아륀지’는 미국말이다. 물론 오렌지는 원래 미국말에서 연유한 것이지만, 황금빛 껍질 속에 새콤달콤한 과육이 들어 있는 한 과일을 한국의 어떤 권위 있는 기관에서 그 말로 부르기로 결정했으면, 미국말이 어떻게 변하건 우리에게서는 그 말이 내내 유지되어야 한다. 이 간단한 상식이 자주 오해되는 데는 한글의 우수성에도 원인이 있다.

한글은 창제 당시부터, 인간의 말은 물론이고 개와 닭의 소리까지 표기할 수 있다고 평가되었지만, 그렇다고 한글이 외국어를 표기하는 발음기호는 아니다. 우리가 오렌지를 오렌지로 표기하는 것은 한국어로 말하는 사람들 간의 소통을 위한 것이지, 외국어를 학습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잊히기 쉬운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외래어를 어떤 글자로 표기하든지, 그 말이 유래한 외국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읽는 방식은 다르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지만, 프랑스에 오래 체류했던 한 언론인이 베르사유 미술관을 ‘베르사유’라고 했더니 알아듣는 프랑스 사람이 없더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어 ‘Versailles’에 들어 있는 ‘R’의 발음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언론인은 ‘벡사이유’라는 표기를 제안했다. 그러나 프랑스어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은 이 표기를 프랑스인처럼 읽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백사 이유’(104 理由)처럼 읽을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실익도 없이 한글을 발음기호의 자리로 끌어내릴 수는 없다.

또한 외래어의 표기는 우리말 전체와 그 외래어의 관계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써오던 말들과 외래어가 이음매 없이 어울리기는 어렵지만, 그 이음매가 가능한 한 의식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교수들의 농담에 프랑스를 국문과 교수는 ‘프랑스’라고 하는데, 불문과 교수는 ‘불란서’라고 한다는 말이 있다.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 간의 차이는 있으나, 이 농담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프랑스 어문학 전공교수들 가운데는 ‘F’를 염두에 두지 않고, 또는 무시하고 ‘프랑스’라고 하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느낌이 남고, 우리말을 하는 중에 조음기관을 낯설게 긴장시켜 서양 사람처럼 ‘프랑스’라고 말하려면 어쩐지 유난을 떠는 것 같아, 차라리 ‘불란서’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프랑스’는 ‘France’에서 온 말이지만, ‘France’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국문과 교수들은 그 점에 자신이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우리말에서 차지하는 한자어의 지위에 관해서도 언급해 두는 것이 좋겠다. 어떤 사람들은 한자어도 외래어로 여기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한자에는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우리 고유의 발음이 있다는 점을 우선 말해야겠으나 중요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한자어를 발음하는 음절 하나하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말 속에 넓고 탄탄한 그물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말에서 ‘오므리다’의 ‘오’는 ‘호박오가리’의 ‘오’, ‘오그랑떡’의 ‘오’, ‘오글오글’의 ‘오’, ‘옴찔’이나 ‘옴팍’에 들어 있는 ‘오’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오성(悟性)’의 ‘오’는 ‘오도(悟道)’의 ‘오’, ‘오열(悟悅)’의 ‘오’, ‘각오’의 ‘오’와 연통하며, ‘오만(傲慢)’의 ‘오’는 ‘오기’의 ‘오’, ‘오상고절’의 ‘오’와 ‘오연(傲然)한’ 그물을 짜고 있다. 그러나 ‘오렌지’의 ‘오’는 우리말 속에서 무엇인가. 외래어는 외국어에서 왔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 속에서 외롭게 사는 언어라는 뜻도 된다. 외래어의 현명한 표기가 어느 정도는 그 외로움을 달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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