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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말글 세상은 큰 바다 … 세상 모든 이름이 흘러든다

〈80〉 일본식 한자어의 정체


한자어로 되어 우리말에 안겨 있는 말들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그 잘잘못을 톺아 지적한다. 최근 불후(不朽)라는 일본식 한자어가 ‘불후의 명곡’과 같이 TV의 제목으로 나와 걱정스럽다는 국문과 교수님의 신문 글을 봤다. 고개 끄덕여지는 말씀, 사전에도 그런 지적은 없다.

‘역사적’(歷史的)이라는 말의 ‘∼적’은 일본인들이 처음 쓴 말이기 때문에 쓰지 말아야 한다는 신문기사(스포츠경향 8월 22일)도 있다. 실은 오래전부터 거듭되어온 지적으로, 한글학자 최현배(1894∼1970)의 주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글 쓴 기자의 다른 글에도 ‘역사적’이란 단어가 떠억 들어가 있다. 그만큼 우리 말글에 녹아있는 표현이어서일까?

“‘행정적 지원’ ‘경제적 중심’ 등으로 많이 쓰는 접미사 ‘∼적(的)’은 순전히 일본말 찌꺼기입니다. 메이지 시대 때 일본인들이 영어의 ‘∼tic’을 옮겨 쓰기 시작한 데서 비롯된 말이죠. … 우리말로 쓸 수 없으면 모를까, 일본 말 찌꺼기를 남발하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일본의 대문을 열었다. 이 사변이 일본을 근대국가로 이끌고 끝내 전쟁하는 제국주의로 몰아간 메이지유신의 신호탄이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 글 쓴 기자는 물론 ‘신문’이나 ‘방송’이란 말이 실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임을 알고 있겠지? ‘기자’(記者) 또한 그렇다. 뭐가 ‘일본말 찌꺼기’일까? 더 큰 문제는 이런 식으로 한국어에 들어온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어떻게 정확히 구분하는지 등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본인이 (처음) 쓴 말을 우리도 쓰는 것이 잘못이라면 이 ‘철학’(哲學)도 잘못이겠다. 그뿐인가, 영어 수학 물리 지리 역사 경제 등 얼핏 떠오르는 교과목 이름들이 죄다 일본식 한자어라면 많은 사람들이 얼마다 당황할까?

지혜(소피아)를 사랑한다(필로스)는 서양어 필로소피(philosophy)의 짝이 밝은(哲) 학문 즉 ‘철학’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서양에 문을 열고 새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필로소피라는 학문은 철학이라고 하자’고 (약속)했다. 1900년경 이 말은 당시 일본과 유럽 등 열강(列强)에 시달리며 뒤늦게 서양을 배우던 우리나라와 중국에도 전해졌다.

최근 서울시가 왜색 말글이나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말글로 고쳐 이를 행정에 적용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공람’(供覽)은 ‘돌려봄’으로, ‘애매(曖昧)하다’는 ‘모호(模糊)하다’로, ‘호우’(豪雨)는 ‘큰비’로 고쳤단다. 또 ‘누수’(漏水)는 ‘새는 물’, ‘우측보행’은 ‘오른쪽 걷기’, ‘차후’(此後)는 ‘지금부터’로 바꿔 부르기로 했다는 것이다.

우리 말글을 갈고 다듬는 이런 노력은 끊이지 않아야 한다. 국가나 사회의 투자나 연구도 중요하지만, 시민 즉 언중(言衆) 개개인과 모둠살이에서도 바르고 고운 우리 말글에 관한 연구나 명상이 활발해져야 한다.

‘한글이 세계언어올림픽에서 수십년 계속 금메달을 받았다’는 황당한 얘기가 인터넷 세상을 떠다닌다. ‘세계 최고 언어학자 아무개가 한글이 세계 최고 언어라고 발표했다’는 식의 말은 흔하다. 이를 들먹이며 한껏 으쓱해하는 이도 많다. 사실인가? 근거는 무엇인가? 희망과 현실을 혼동하는 빗나간 자부심은 아닌가?

한글이라는 우리의 이 자산은 자랑스러운 것이지만 자긍심이 자칫 자만(自慢)을 부를 수 있다. 공부 없는 ‘나의 모국어’는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자칫 무지(無知)의 이름이 될 수 있다. 근대 역사가 우리 집단의식에 남긴 깊은 상처가 열등감이 되어 그런 식으로 표출(表出)되는 것은 아닌지도 저어한다.

이런 ‘자부심’이 모국어를 공부하여 위대한 언어로 만드는 노력으로 이어지는지 돌아볼 일이다. 혹 우리 말글에 관한 바른 생각을 저해하는 것은 아닌지도 반성해봐야 한다. 국수주의(國粹主義)는 옹졸한 자폐(自閉)다. 그러고 보니 국수주의라는 말도 일본식 한자어로구먼.

‘일본어 찌꺼기’에 대한 생각처럼, 영어가 무절제하게 한국어에 흘러들어 또 다른 찌꺼기가 되고 있음도 걱정해야 한다. 외래어(外來語)와 외국어의 명확한 구분도 중요하다. 다른 언어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고 ‘나쁜 찌꺼기’는 잘 버리는 것이 언중의 현명한 선택일 터다.

말글 세상은 바다다. 세상 모든 사물(事物) 즉 일과 물건의 이름을 부르고 적는 것이 언어다. 글로벌이라는 개방의 시대, 문 닫으면 바로 패배한다. 언어도 그렇다. 일본말이니까 ‘철학’ ‘방송’ ‘물리’를 버릴까? 중국서 왔으니 한자(어)도 버릴까? 한국어를 적는 문자인 한글은 세상 모든 말을 그 뜻과 함께 적을 수 있어서 위대하다. 바르게 공부해야 그 품의 크기를 안다.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 사족(蛇足)

서울 세종로의 세종대왕 동상. 세종은 훈민정음(한글의 원본)을 지어 우리의 말인 한국어를 적는 문자체계를 완성했다. 진지한 공부로 한글을 발전시켜 한국어를 세계화의 발판으로 삼는 일은 우리의 임무다. 이 과업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일본식 한자어는 어떻게 한국어에 들어왔을까? ‘메이지유신’이라고도 하는 명치유신(明治維新·1853∼1877)으로 일본은 서구의 문물(文物)을 급속히 받아들여 인류 역사에서 보기 힘든 대단한 발전을 기록했다. 그때 과학을 비롯한 서양의 학문을 수용하기 위해 일본의 학자들은 philosophy를 哲學으로 번역하는 것과 같은 방대한 작업을 벌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자를 토대로 한) 사물의 이름들은 ‘서구화’ 후발주자인 한국과 중국으로 퍼져나갔다. 더구나 일본의 ‘먼 나라’이기도 한 ‘이웃나라’ 한국은 그들의 식민지가 되어 지배를 받았다. 일본(인)의 틀(프레임)로 생각하고 말해야 했던 이 땅에 그들의 말이 침투한 것은 당연하다. 해방 후에도 잘 사는 그들의 여러 모습을 본보기 삼았다.

원래 일본어와 함께 명치유신 이후 새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들도 들어왔다. 이런 말들도 우리 말글과 비슷하게 한자어가 압도적으로 많다. 어떤 말들은 한자어의 일본말 발음으로 들어왔다. 무대뽀(무철포 無鐵砲) 입빠이(일배 一杯)가 그 예다. 일본 한자어를 우리(한국어) 한자어로 들여온 것도 많다. 철학 음악(音樂) 주식회사(株式會社) 등이 그렇다.

광복절 한글날에 일제 잔재(殘滓·찌꺼기) 때문에 짜증을 내더라도, 이런 사정쯤은 알고 있어야 무식한 헛발질을 피할 수 있다. 말과 글은 우리의 생각을 고정하고 이동시키는 도구지만, 그 자체가 세상의 본디이기도 하다. 역사나 철학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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