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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학술용어의 운명|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학술용어의 운명

경향신문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2015.08.20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는 그 첫 대목에서 나라가 나라로서의 권리를 빼앗기던 시대의 슬픈 일화들을 열세 살 소년의 눈으로 전한다. 그 시대는 또한 학문의 패러다임이 결정적으로 바뀐 시대이기도 했다. 이미 <통감>과 <맹자>와 <중용>을 읽은 어린 선비소년은 신식학교 2학년에 배정되어 서구의 지식을 배우기 시작한다. 삼각형 유리막대를 통과한 빛이 여러 색으로 나뉘는 그림, 구리그릇 2개를 진공 상태로 맞붙여놓고 네 마리 말이 양쪽에서 끌어당기는 그림을 그는 자연책에서 보지만 그 이치를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소년보다 더 딱한 것은 그의 아버지다. 지방의 대학자였던 아버지는 그 원리를 아들에게 설명해주지 못하고, 오직 선생의 말을 더 찬찬히 들으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아버지에게는 평생을 두고 쌓아온 학식이 무용지물이 되려는 순간이었다. ‘분광’이니 ‘기압’이나 하는 말들이 그 개념과 함께 그렇게 이 땅에 들어왔다.

서세동점의 시대에 서구의 지식체계를 한자문화권의 다른 나라들보다 먼저 접할 수 있었던 일본의 학자들은 그 체계를 외곽에서부터 세부까지 설명하는 데 필요한 수만 개의 말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한문과 한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쪽 세계에서 그때까지 쌓아온 학식의 모든 개념이 그 한문과 한자 안에 온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문과 관련된 이 한자 용어들은 우리에게서도 식민지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국권을 되찾은 이후까지 지식체계의 거의 전체를 설명하는 말이 되었다. 논란은 끝없이 많았다. 지식의 개념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말로서 그 용어들이 얼마나 적합한지를 따지는 문제는 오히려 뒷전에 밀렸다. 한자 용어는 우리의 고유어가 아니며, 그 말들을 만든 것은 일본인들이어서 학문과 언어의 자주성을 해친다는 주장이 사람들을 흔들었다. 고유어와 토속어와 일상어의 중요성을 말하는 언어적 낭만주의의 열정은 모든 학술용어를 ‘순우리말’로 바꾸려는 시도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로서는 근대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일본 학자들이 만든 한자 용어들을 ‘일본인들이 만든 말’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자문화권 전체가 한자문화의 지식과 배경에 힘입어 만든 말이다. 이런 내 주장은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자는 것도 아니고 정신승리를 구가하자는 것도 아니다. 말을 만드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말을 받아들여 사용하는 사람도 언어의 주체다. 알아듣는 사람이 없이 언어가 통용되겠는가. 같은 한자문화권에 살던 우리에게는 새로운 문명 앞에서 그 말들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도 있었고 그 말들을 사용할 능력도 있었다.

새로운 말을 만든 사람들도 이 다른 주체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던 같다. 그들이 한문 고전의 밑바닥을 훑고 있었던 것은 배워야 할 신지식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것을 오래된 지식의 바탕 위에서 이해해야 할 정신 상태도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예를 들자. 이 근면한 학자들이 열의 전달과 관련하여 ‘복사(輻射)’라는 말을 만들면서, 그 말에 해당하는 서양어 radiation이 ‘수레바퀴살’을 의미하는 라틴어 radius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염두에 두고 ‘수레바퀴살 輻’자를 한문고전에서 찾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식의 새 패러다임이 폐기되는 패러다임과 만나고, 오래된 세상의 사람이 새 지식과 만날 수 있는 접합점 만들기에 그들이 얼마나 고심했던가를 말해준다.

최근에는 새로운 학술 개념이 발생할 때마다 새말을 만들어 쓰기보다 원어의 음을 그대로 한글로 표기하자는 주장이 대두하여 차츰 세력을 얻고 있다. 이 세력 뒤에는 물론 영어의 세력이 있다. 기호학에서 사용하는 프랑스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예로 들 만하다. 이 한 쌍의 말은 식민지 시대부터 지난 1980년대까지 ‘능기, 소기’로 번역되었으나, 각종 문서에서 한자가 사라지고 ‘능(能)’과 ‘소(所)’의 조어원리가 한글 뒤로 가려져버린 1990년대 이후 ‘기표, 기의’로 번역되었다. 이 말들은 어떻게 표기되어도 설명이 뒤따라야만 그 뜻이 이해될 수 있기에 시니피앙, 시니피에처럼 원음 그대로 쓰건, 능기, 소기로 쓰건, 기표, 기의로 쓰건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유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한자어와 다른 외래어는 우리말 속에서 갖는 언어학적 가치가 다르다. ‘시인’의 ‘시’는 시정, 시집, 시심, 시문학, 서정시, 서사시와 연결되고, ‘시작’의 ‘시’는 시동, 시말, 시원, 시조, 시종, 시초, 개시와 연결되어 그물망을 형성하지만, ‘시니피앙, 시니피에’의 ‘시’는 우리말에서 무엇인가. ‘능기’나 ‘기표’와 달리 ‘시니피앙’은 우리말 속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으며, 고립된 말들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져도 한 언어체계 전체에 깊이를 만들지 못한다. 그물망과 연결 고리를 갖는 낱말은 그 자체를 설명하는 힘도 그 그물망에서 얻지만 더 나아가서는 그 그물망을 풍요롭게도 한다. 한 낱말은 항상 다른 낱말에 의지하여 그 뜻을 드러낸다. (순우리말 학술용어 다듬기가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도 한자어만큼 강한 그물망을 확보하지 못한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

원음을 그대로 표기하는 것이 그 말에 대한 오해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도 위험하지만, 모든 학술용어를 이미 세계 공용어가 된 영어로 통일함으로써 범세계적 학문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보다 더 위험하다. 이런 생각이 실현된다면 우리말 전체가 학문으로부터 소외될 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모든 지적 활동으로부터 소외된다. 간단히 말하자. 인간의 의식 밑바닥으로 가장 깊이 내려갈 수 있는 언어는 그 인간의 모국어다. 외국어는 컴퓨터 언어와 같다. 번역과정을 거칠 때의 논리적 정확성에 의해서도 그렇지만 낭비를 용납하지 않은 그 경제적 측면에서도 그렇다. 지식과 의식의 깊이를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낭비에 해당하며, 그 낭비에 의해서만 지식은 인간을 발전시킨다. 외국어로는 아는 것만 말할 수 있지만 모국어로는 알지 못하는 것도 말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말은 도구적 기호에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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