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연구자료
관련기사

관련기사|

한글전용의 허와 실|

한글전용의 허와 실

전북일보 안도 작가 2015.09.17


한글전용이란 모든 글자를 한글로만 쓰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뜻 자체도 순 우리말로 써야 한다는 말인가? 아리송하다

“지독한 감기로 고생은 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괜찮다. 그런데 나는 나았지만 이번에는 동생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조용했지만 나사가 풀린 듯한 목소리에서 나는 괜히 이상한 느낌이 들었고 나에게 전염이 되었나 싶어 은근히 겁도 났다. 어렸을 때는 허구한 날 나를 귀찮게 해서 내가 가끔씩 혼내주던 그 동생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이렇게 한자 없이 오직 한글로만 쓰여 진 이런 글귀를 보면 언뜻 한자어가 하나도 포함되지 않고 순전히 우리말로만 된 글같이 보인다. 그래서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글귀를 좋아할 것이고 이런 글이 한글만으로도 얼마든지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할 지 모른다. 하지만 이 글 속에는 많은 한자가 숨어 있다.

그 첫 마디 지독(至毒)하다는 말은 어떤 상태가 독(毒)에 이를(至) 정도로 아주 심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감기(感氣)라는 말은 차가운 기운(氣)을 슬쩍 느끼기(感)만 해도 걸리는 병이라 해서 붙여진 말이다. 고생은 어렵고 힘든 경험이 곧 쓴(苦) 인생살이(生)이기에 고생(苦生)이라고 했다. 하지만 요즈음 이 구절을 “至毒한 感氣로 苦生했다”고 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말들은 이미 우리말로 토착돼 굳이 한자로 표시할 필요도 없고 한자어라고 하기도 어색하다. 단지 그 본디가 한자어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할 따름이다.

“기분은 괜찮다.”라는 구절에서도 기분(氣分)이 한자의 뿌리를 갖고 있다. ‘기운 기(氣)’자는 이렇게 감기나 기분 같은 말의 뿌리가 되었지만 그 자체로도 기(氣)가 차다, 기(氣)가 막히다, 기(氣)가 꺾이다, 기(氣)가 죽다, 기(氣)가 살다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우리말 속에 일찍부터 기(氣)가 담겨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이 기(氣)에 심취하고자 기(氣)를 쓰는지도 알 듯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괜찮다’는 말에 숨어 있는 한자를 찾아내는 일이다. ‘괜찮다’라고 세 마디소리(三音節)로 줄어 든 이 말의 어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괜치 않다, 괜치 아니하다, 괜ㅎ지 아니하다......’ 등으로 밝혀지고 마지막에는 ‘관계(關係)하지 아니하다’라는 한자어가 담긴 본디 말을 찾게 된다. 어떤 일이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데서 ‘괜찮다’라는 표현이 생긴 것이다. ‘귀(貴)하지 아니하다’가 줄어서 ‘귀찮다’가 된 것이나 ‘공연(空然)히’가 줄어서 ‘괜히’가 된 것이 그것이다. 오늘날 ‘괜찮다, 귀찮다, 괜히’ 같은 말이 우리말이 아니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많은 우리말이 한자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동생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에서 동생도 같은(同) 부모에게서 낳았다고(生) 해서 동생(同生)이다. 예사(例事)롭다, 이상(異狀 또는 異常)하다도 한자어다. ‘조용하다’는 말도 원래 ‘종용(從容)하다’가 변한 것이다. 겉으로는 안 보이지만 한자어가 우리말 속에 ‘조용히’ 들어와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굳건(健)하다, 익숙(熟)하다, 말쑥(淑)하다, 얄팍(薄)하다, 멀쩡(淨)하다, 스산(酸)하다, 썰렁(凉)하다, 두둑(篤)하다, 착(?)하다, 성(成)하다, 환(煥)하다, 용(靈)하다 등 무수히 많다.

‘나사(螺絲)’라는 말이 한자어라는 것은 모르더라도 영어나 불어라고는 하지 말아야겠다.

물론 ‘분명히, 도저히, 심지어, 대체, 도대체, 대관절’같은 부사도 한글로 정착된 말이지만 그 어원은 ‘勿論(물론), 分明(분명)히, 到底(도저)히, 甚至於(심지어), 大體(대체), 都大體(도대체), 大關節(대관절)’이다.

우리말이 본래 한자어라고 해서 반드시 한자로 적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고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많은 ‘우리말’ 속에 한자어가 담겨 있다는 것을 일깨우고자 함이다.

△남원 출신인 안도 작가(67)는 1982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동화집 〈민들레의 꿈〉, 〈선생님은 미운가봐〉, 〈산에는 꽃이 피네〉와 시집지하수〉 등이 있다. 현재 제30대 한국문인협회 전북지회장이다.

댓글 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수 작성일
460 한글전용과 한자병기, 어느 게 옳은가? 어문정책관리자 2159 2015.09.23
459 실질문맹 회복, 지식경제시대의 필수조건 어문정책관리자 2165 2016.01.08
458 한자문맹 방치하는 국어교육 어문정책관리자 2168 2015.08.27
457 [종합]교육부, 초등교과서 한자병기…300~600자 적절 어문정책관리자 2169 2015.08.25
456 “실질문맹률 OECD 꼴찌… 신문통해 문해교육 강화 필요” 어문정책관리자 2170 2016.04.08
455 [한국의 儒商] 통감·대학·논어… 서당서 싹 튼 호암DNA 어문정책관리자 2171 2016.03.14
454 내가 만난 중국인/장효택 전 에너지관리공단 경남지사장 어문정책관리자 2171 2015.10.28
453 교수도 몰랐던 말, '기하학' 뜻을 아시나요? 어문정책관리자 2175 2015.10.08
452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교육 촉구 국민대회 개최 어문정책관리자 2175 2015.08.25
451 이근면 인사혁신처장 "공무원들 한자문맹 심각한 수준" 어문정책관리자 2177 2015.10.14
450 [이택수의 여론]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 "찬성 63% vs 반대 30%" 어문정책관리자 2178 2015.10.08
한글전용의 허와 실 어문정책관리자 2179 2015.09.18
448 초등학교 한자교육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문정책관리자 2179 2015.10.01
447 한류 날개 달고 세계로 50년 맞은 고전번역사업 어문정책관리자 2180 2015.11.25
446 강동구, 모든 사업에 ‘청소년 교육’ 영향 평가한다 어문정책관리자 2182 2015.10.26
445 김경수 상임이사,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병기 실행 1인시위 어문정책관리자 2183 2016.01.29
444 읽고 기록하고 행동하라 어문정책관리자 2183 2016.08.16
443 "초등 한자교육, 최현배도 꾸짖지 않을 것" 어문정책관리자 2186 2016.07.20
442 "쉽고 정확한 한문고전 번역서 없어 안타까웠죠" 어문정책관리자 2188 2015.11.27
441 한자문화정상화 추진회 발족 어문정책관리자 2194 2015.10.02
후원 : (사)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사)한국어문회 한자교육국민운동연합 (사)전통문화연구회 l 사무주관 : (사)전통문화연구회
CopyRight Since 2013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 All Rights Reserved.
110-707. 서울 종로구 낙원동 284-6 낙원빌딩 507호 (전통문화연구회 사무실 내) l 전화 : 02)762.8401 l 전송 : 02)747-0083 l 전자우편 : juntong@juntong.or.kr

CopyRight Since 2001-2011 WEBARTY.COM All Rights RESERVED. / Skin By Webar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