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수업 시절>, 이호철 외 지음
문학사상사, 1991
“내가 소설에 한자를 쓰는 것은, 소설은 같은 시간예술인 음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감상의 일회성 때문이고, 한글 전용을 하게 되면 어려운 낱말을 피하게 되며, 생소하고 어려운 내용을 경원(敬遠)하게 되기 때문이고, 우리 소설이 옆으로만 퍼지고 위로 뻗지 못하는 첫째 원인이 한글 전용에 있었다고 믿기 때문이다.”(83쪽) ‘원로·중견문인 50인의 육성으로 말하는 자기 고백’(부제)을 모은 <나의 문학수업 시절>을 재미나게 읽다가 장용학(張龍鶴)의 위 구절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유홍준님 최근 이렇게 썼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는 문제를 놓고 또 찬반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나는 한글전용론자이다. 글쟁이로 살면서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꾸려고 항시 고민하며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한글 전용과 한자 교육은 별개 사항이다. 한글 전용을 할수록 한자 교육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경험이고 내 생각이다. 한자를 알면 우리가 쓰고 있는 단어의 의미와 유래를 명확히 알 수 있다.”(<한겨레> 4월29일치) 5월3일치 ‘왜냐면’의 김영환 한글철학연구소장의 반론, “‘한글 전용’엔 역사적 이해가 필요하다”도 중요한 지적이었다.

두 가지 의견에 모두 동의한다. 나도 우리말을 사랑한다. 한국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한글이 모국어이기 때문이다. 꿈에서라도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나는 그것이 모국어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안다. 어느 문자든 근본적으로 우월하거나 우선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예전에 국어교사 모임에서 한자 교육, 한자 병기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가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그들의 주장은 학원 사업은 번창하고 학생들의 학습 부담만 커진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나는 한문 교육에 동의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는 반대다. 초등학교 때는 정치, 건강, 환경 교육이면 충분하다. 한자 교육의 필요성과 제도화는 다르다. 모든 국민이 영어회화를 할 필요가 없듯이 한자 공부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의 노벨상 타령이 민망하지만, 수상한다 해도 문학이 아니라 이공계에서 나올 확률이 높다. 일단, 이 땅에는 ‘분단조국’과 국가보안법이라는 반(反)언어가 엄연하다. 문학은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에서 나온다. 서구인의 시각에서는 생소하기 짝이 없을 일본어의 노벨상 수상은 그래서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일본어는 히라가나, 가타카나, 한자, 장음(長音), 경어까지 다섯 개 요소가 변화무쌍한 조합을 구사한다.

한글 전용은 찬반을 논할 의제가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한글 전용 자체라기보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발상이다. 이미 유비쿼터스, 알고리즘, 젠더 같은 용어를 공식 문서에서 사용할 뿐 아니라 men崩, 心쿵, 無pl(y) 등 한자, 영어, 의성어, 감탄사가 혼재된 단어가 신문에 등장한다. 중화와 일제에게 말을 빼앗긴 시대와, 거의 모든 젊은이가 외국어 공부에 인생을 건 지금은 다르다.

나는 한글 전용이 상징하는 ‘방어 심리’의 정체가 궁금하다. 하이브리드(hybrid)는 자동차 이름 이전에, 탈식민주의 이론가 호미 바바가 명명한 지구화 시대 문화의 성격을 정의한 단어로 잡종성, 혼종성을 뜻한다. 탈식민주의는 글자 그대로 식민주의에서 벗어나자는 의미다. 동시에 하이브리드 개념의 핵심은 모든 문화는 식민 지배 이전의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의 본질은 유동(流動), 그 흐름과 포말이 가장 격렬한 영역이 말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혼용은 언어의 성질이다. 영어에는 전 세계 언어가 녹아 있다. 장용학의 표현은 지나친 감이 있지만 한자는 한글 구사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자를 우리말에 수용(水溶)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나는 ‘우리말’의 ‘우리’는 누구인가를 묻고 싶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다. 말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국어는 전용정책이 아니라 다양한 서벌턴(sub-altern, ‘民’)들의 목소리가 가시화될 때 가능하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