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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산책] 한자문화권서 외면 받는 한자|

필자는 중국 친구가 한국을 방문하면 가끔 유적지나 고찰을 구경시켜 줄 때가 있다. 그곳 안내문 앞에 서면 겁부터 난다. 더러는 누군가가 이미 틀린 글자를 알아내고 돌로 긁어버리거나 콩콩 찧어 마멸시키려 애쓴 흔적도 있다. 얼굴이 붉어진다. 완벽하게 오류가 없는 안내문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충주 고구려비가 그렇고 화순 운주사 와불 곁의 안내판은 백색으로 지워져 있다. 밀양역 플랫폼에 있는 거대한 관광안내 구조물 간판에는 '표충사'의 한자를 '表忠寺'가 아닌 '表忠詞'로 잘못 표기해놓았다. 해남의 녹색 교통표지판은 '두륜산(頭崙山) 대흥사 가는 길'로 갈색 유적지 교통 표지판은 '頭輪山'으로 돼 있어 일주문 앞에 가야 '頭輪山'이 올바른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공공기관·민간 모두 한자 오기 심각

그뿐이 아니다. 서울 지하철에는 한 행정부처가 어민들을 돕기 위해 붙인 홍보물에 "활어회(活漁膾) 직송(直送)해드립니다"라고 표기돼 있다. '물고기(魚)'와 '물고기를 잡다(漁)'를 구분하지 않은 채 물에 사는 고기이니 '漁'로 추정한 것처럼 보여 쓴웃음을 자아낸다. 믿을 만한 한 대학병원 진료실 앞에도 '내분비대사과(內分泌代射科)'라고 써 있다. 묵은 것과 새것이 차례대로 사그라진다는 뜻인 신진대사(新陳代謝)의 '사(謝)'는 화학물질·소화액 등에 의해 '삭다, 삭아지다'라는 뜻이 있음을 모른 채 '대신 쏘아주다'의 의미로 바꿔놓았다. 의술이 대단히 발달했나 보다. 그 정도면 그래도 애교다. 신문 입시 광고에 '위국양재(僞國養才)'로 실었다. '나라를 위선으로 이끌 인재를 키우겠다'니 해도 너무했다. 서울 근교 등산로에는 지방자치단체가 달아놓은 '내가 만든 쓰레기는 내 베낭에 담아가세요!'라고 적힌 팻말이 있다. '등에 짊어지는 자루'라는 '배낭(背囊)'을 모른 채 흔한 서양식 아웃도어 레저 용품은 모두가 서양어일 것이라는 지레짐작이 낳은 결과다. 한때 종말론으로 세상이 떠들썩했을 때 휴거(携擧)를 영문인 줄 알고 'huger'로 표기한 선전 쪽지를 본 적도 있다.한자문화권에 살면서 한자를 모르는 것에 대해 별 심각성을 느끼지 않는 것은 문제다. 과거 2000년이 시작되면서 세계화를 앞세워 새 건물에 '밀레니엄(Millennium)' 간판을 세우면서 'n'자를 빠뜨린 채 걸어 지탄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우리 사회는 영문 철자법 오류는 참지 못하면서 한자 오류에는 너무 너그럽다.

필자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한자를 외면하기는 마찬가지다. 기말시험에 사자성어, 그것도 아주 흔히 쓰이며 수업시간에 거론한 것을 문제로 냈더니 거의 손을 놓은 채 한숨만 쉰다. 안되겠다 싶어 몇년 전부터 한자 쓰기에 관심을 갖도록 신문 사설의 한자어를 국어사전을 보고 한자로 써오는 과제를 냈더니 더욱 가관이었다. 빈민구제(貧民救濟)의 구제는 '驅除'로, 남북한 신뢰구축(信賴構築)의 구축은 '驅逐'으로 정성껏 그려내는 것이었다. '빈민은 몰아내어 없애야' 하고 신뢰는 '몰아 쫓아내버려야' 한다니. 이게 한자 사용의 현실이다. 그러면서도 불편함이나 심각성을 느끼지 않는 덩치 큰 대학생들이 적지 않다.

어디 그뿐이랴. 혈연관계를 구분하는 데 한자를 변별지표로 삼았던 우리의 성씨에 대해 가족기록부에도 한글전용화를 적용하겠다고 강제하자 강씨(姜·康·江), 정씨(鄭·丁·程), 신씨(申·辛), 방씨(方·房·龐), 전씨(全·田·錢), 연씨(延·燕·連) 중 어느 것이 나의 성씨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 현상도 나타났다. 나아가 여기에 두음법칙까지 적용해 임씨(林·任), 유씨(柳·劉·兪·庾), 양씨(梁·楊·揚), 노씨(盧·魯·勞·路), 여씨(呂·余·黎) 등은 졸지에 동성이 되고 말았다.

한중일 기층문화 뿌리이며 자산

이제 족보상으로도 어쩌다 본이 같으면 동성동본이 되고 만다. 이 같은 폐단이 반복된다면 앞으로 몇십 년 뒤면 상대방이 전혀 다른 성씨인지 근친인지 모른 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단일민족에 단일성씨로 결속력을 다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는 지름길이 될까 두렵다. 후손들이 자신의 근원이 버드나무인데 소나무에게 가서 뿌리를 찾겠노라 한들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한자문화권에서 민족의 정서와 역사를 이어왔다. 문화는 공유하며 함께 발전하는 원동력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자를 문화적 측면에서 보지 않고 소유적·배타적 대상으로 삼아왔다. 한자는 한중일의 원초적 기층문화의 뿌리다. 한자를 보는 시각만 바꾸면 엄청난 자산이 된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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