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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자, 교과서 한자 병기|

[중앙시평] 뜨거운 감자, 교과서 한자 병기

중앙일보  2015.05.13


박경미 홍익대 교수·수학교육과

청소년들이 애용하는 ‘쩐다’라는 표현은 지극히 불만족스러운 상황에도, 경탄할 만큼 좋은 경우에도 쓰인다. 화자(話者)가 어떤 의미로 ‘쩐다’라고 했는지 청자(聽者)는 맥락에 따라 적절하게 해석해야 한다. 이처럼 하나의 표현을 다양한 의미로 변신시키는 현상은 청소년들만의 언어를 통해 유대감을 강화하려는 심리에서 비롯됐겠지만 어휘 부족도 한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다. 10대들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를 분석해보면 몇 가지 표현으로 수렴되는데, 각 상황에 대응되는 세분화된 표현을 고안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어휘력이 약화된 면도 있다.

 우리말의 상당수가 한자를 포함하고 있는 이상 어휘를 풍부하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는 확장성을 가진 한자를 습득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바람풍(風)을 배운 후 이미 알고 있던 태풍·풍경·풍력발전소 등의 단어가 풍(風)을 중심으로 접합되고 더 많은 단어와 연결고리를 형성하면서 느꼈던 뿌듯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학창 시절에는 적외선을 빨간색(赤) 바깥(外)으로 풀이하며 적외선이 빨주노초파남보의 가시광선 너머에 있음을, 구심력과 혼동하던 원심력은 중심에서(心) 먼(遠)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이라고 자연스럽게 기억할 수 있었다.

 지난해 9월 교육부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주요 사항을 발표하면서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올해 9월 교육과정 고시를 앞두고 한자 교육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재연되고 있다. 한자 병기를 찬성하는 쪽에서는 교과서의 용어 대부분이 한자어이기 때문에 그 뜻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한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자 병기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용어의 뜻은 글자가 아닌 상황과 맥락을 통해 터득되기 때문에 한자로 표기해야만 뜻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더구나 한자를 병기하면 문장의 가독성이 떨어지고 45년 동안 지켜온 한글전용교육의 전통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한자 사교육을 조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이런 주장을 하나씩 따져보자. 한자 학습은 배우고(學) 익히는(習) 것 중에서 후자 위주이므로 사교육이라 해도 학원보다는 학습지를 통해 익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교육부가 ‘정책’을 만들면 사교육은 ‘대책’을 내놓기 때문에 한자 병기로 사교육이 얼마나 횡행할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한자 자체를 묻는 평가를 하지 않는다면 학습 부담 가중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현재도 초등학생들이 한자급수 시험을 보기 위해 한자를 단순암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보다는 교과서의 용어를 한자와 더불어 익히는 소박한 한자 학습이 나을 수 있다.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할 때 읽는 속도가 느려질 수 있다는 것은 일정 부분 사실이다. 가독성을 떨어뜨리지 않으려면 한자를 교과서 본문이 아니라 보조단에 적어주면 된다.

 한자를 동반한 설명이 학생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예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수학의 양수(陽數)와 음수(陰數)에 대응되는 중국과 일본의 용어는 정수(正數)와 부수(負數)다. 양수가 이익이라면 음수는 부채(負債)이므로 부수(負數)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식 발음에서는 정수(正數·positive number)와 정수(整數·integer)가 동음이의어가 되어 한자 종주국에 없는 독창적인 용어를 만들어낸 것으로, 양수와 음수는 음양이 대비를 이루면서 0을 기준으로 상반된 수라는 성질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용어에 대한 한자 설명을 병행하는 게 도움이 된다면 제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한자를 과다하게 사용하는 관습은 점진적으로 걷어내고, 상용 한자어도 궁극적으로는 한글화할 필요가 있다. 최근 어떤 대학생이 ‘금일(今日)’을 금요일의 축약어라고 생각해서 일어난 해프닝을 들었는데, 금일을 이해하지 못한 대학생의 한자 실력도 문제지만 오늘을 굳이 금일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큰 문제다. 구한말 음악계는 알레그로(allegro)를 쾌속조(快速調)가 아니라 ‘빠르게’로 간명하게 한글화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이해하게 된 점은 모범사례가 될 만하다. 하지만 적외선에 대응되는 ‘넘빨강살’과 같이 무리하게 한글화한 어색한 용어는 일상 언어로 편입되지 못했다는 점을 참고해야 한다.

 각 교과의 지식을 함축해 담아낸 용어는 학습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된다. 학습은 용어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고 배운 지식을 머릿속에 정리하는 것 역시 용어를 매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자어는 가능하면 한글화하되, 한자 병기가 용어 이해를 촉진시키는 경우라면 교과서에 적어주자. 한자 병기가 한자 교육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 습득의 효율성을 높이는 차원에서라면 한글전용과 한자병용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박경미 홍익대 교수·수학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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