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연구자료
관련기사

관련기사|

[강상헌의 만史설문] 시해(弑害)와 살해|

[강상헌의 만史설문] 시해(弑害)와 살해

윗사람 죽인 것을 ‘시해’라 써 살해와 구분… 우리글엔 계급이 있다

세계일보 2014.10.28



장관을 이루었다. 만조백관과 전국에서 몰려든 상여꾼들이 상여 줄을 잡았다. 상여는 종로와 청량리를 거쳐 홍릉에 안치되었다. 사망 후 2년 2개월이 지나 치르는 늑장 장례였다. 조정은 국장에 드는 엄청난 경비를 대기 위해 부호들에게 돈을 받고 벼슬을 팔았다. 참봉 따위의 말직 벼슬을 받은 이들은 상여 줄을 잡고 위세를 떨었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한 장면. 을미사변 120주기인 2015년이 다가오면서 명성황후의 비극을 재조명하고 추모하려는 움직임이 문화계 안팎에서 활발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1897년 명성황후 국장의 모습과 사회상을 묘사한 ‘소설 서재필’(고승철 작, 2014년)의 한 대목이다. 쓰디쓴 역사의 한 장면이다. 1895년 10월의 어느 밤, 왜(倭)의 술 취한 도적 무리가 총칼을 들이대고 대한제국의 안방을 짓밟아 나라의 기운을 어지럽혔다. 민비 시해사건이라고도 한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무참(無慘)하게도 당시 우리나라를 쥐락펴락한 존재는 ‘일본’이라고도 하는 왜였다. 왜의 미우라 공사가 주동이 되어 처참한 살육(殺戮)을 벌였다. 자기들끼리는 ‘여우사냥’이라고 했다던가. 대단한 정치력으로 저들의 야욕에 훼방꾼이 된 우리의 왕비(王妃)를 죽였다. 고종이 황제(皇帝)를 칭했으니 황후(皇后)다. 그 죽이고 죽임당한 것을 보통 시해라고 한다.

이 무렵이면 10·26을 떠올리게 된다. 철석같이 믿고 써 먹던 부하의 총에 대통령이 살해된 사건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라고 한다. 1979년 10월26일 밤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가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를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유신 체제가 몰락했고, 18년 박정희 권좌(權座)는 무너졌다.

시해(弑害)는 뭔데 이런 특별한 상황을 표현하는 제목이 되는가. 어떤 살해가 시해인가. 예로 든 두 사례의 어법(語法)을 보니 시해는 윗사람을 (아랫사람이) 죽인 상황을 이르는 개념이다. 큰 범위인 ‘살해’ 중의 한 부분인 것이다.

대부분이 경우 말의 뜻을 새기는 사전(辭典)은 이런 활용법의 이유를 보듬고 있다. 두드리면 보여준다. 혹 고사(故事)가 바탕이 되어 만들어진 말이나 전문 분야의 어휘는 사전(事典)과 상의할 일이다. 국어사전, 한자사전, 영어사전 등은 말 사(辭)자 辭典이고, 백과사전과 같은 특별한 사전은 일 사(事)자 事典이다.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 낭인 구니토모 히게아키의 후손이 을미사변 110주기였던 2005년 경기 여주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 황후의 초상화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한자사전은 시(弑)를 ‘윗사람을 죽이다’라고 푼다. 살(殺)자의 왼쪽 글자 杀[살]과, 式[식]의 합체다. 죽일 殺의 원형인 杀과 ‘(윗사람을 죽이고) 그 대신 들어앉는다는 뜻으로 기능하는’ 式자를 합쳐 살해의 한 형태 또는 상황을 나타낸 것임을 알 수 있다. 말글의 긴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쓰는 것이 좋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고 상상해보면 어떨까. 문자(한자)의 상당수는 은유(隱喩) 또는 암유(暗喩)를 방법으로, 또는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다. 직접적인 비유는 ‘내 마음은 호수처럼 잔잔하다’이지만, 은유는 ‘내 마음은 호수요’ 하는 식의 차이가 있다.

殺의 원형 杀자의 어원(語源)인 갑골문은 날카로운 무기가 머리에 꽂힌 채 꼬리를 늘어뜨리고 죽어 있는 다리 4개의 들짐승 그림이다. 나중에 몽둥이 든 손의 (그림)글자 殳[수]가 붙었다. (정대현 편저 ‘다산 천자문’에서)

먹고 살기 위해 인간이 죽여야 하는 들짐승을 그린 그림으로 ‘문자의 새벽’을 살던 사람들은 ‘죽이다’란 뜻을 표현했다. 은유법의 제대로 된 본보기다. 그림을 뜻으로 전환하여 기억하고 생각하고 기호화(디자인)하는 과정은 문자화(文字化)이기도 하겠지만, ‘인류의 자랑’인 문화(文化)의 첫 발자국이기도 할 터이다.

‘윗사람을 죽이다’라는 뜻을 혹 영어에서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암살(暗殺)하다’라는 뜻의 assassinate[어새시네이트]라는 말이 좀 특별한 죽임을 뜻하지만 거의 ‘죽이다’, ‘살해하다’라는 단순한 뜻의 kill[킬]이나 murder[머더]다. 전쟁터에서 죽이는 것은 slay[슬레이]다. 영어에는 ‘죽임’에 계급이 없는 것이다.

비유적 표현들은 영화 제목으로 쓰일 정도로 재미있다. 끝장내다는 말 terminate[터미네이트]는 ‘터미널에 이르다’라고 생각하면 쉽게 ‘죽이다’의 뜻이 연상된다. 청산(淸算)하다, 셈을 마치다는 뜻 liquidate[리퀴데이트]나 제거하다는 eliminate[엘리미네이트]도 ‘죽인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손도끼를 든 남자 hatchet man[해치트 맨]은 ‘살인청부업자’의 뜻이다.

살(殺)의 杀자를 분해해서 ‘풀과 나무를 베는 것에서 殺이란 글자가 비롯됐다’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다. 풀 베는 일을 이르는 예초(刈草)의 刈자와 나무 목(木)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겠다. 한자의 역사가 갑골문의 출현으로부터 무려 3500여년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글자의 발생과 전승, 변화에 갈래나 주름이 적지 않을 것임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윗사람인 부모나 임금[군(君)]을 죽이는 것을 시해(弑害)라고 썼다. 시살(弑殺)도 같은 뜻이다. ‘거꾸로’ ‘반역(叛逆)’의 뜻을 가미한 시역(弑逆)이란 말도 있다. 특히 임금을 죽였을 때는 시군(弑君)이다. 역사를 구성하는 여러 낱말에는 이렇게 속뜻이 담겨 있다.

강상헌 평론가·우리글진흥원장 kangshbada@naver.com

댓글 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수 작성일
240 한자 알면 한글 교육에 걸림돌 될까 어문정책관리자 2611 2014.11.12
239 <시론> 학습능력 향상시키는 한자교육 어문정책관리자 2574 2014.11.06
238 한자 많이 알수록 어휘력 풍부…교과 학습에도 도움 어문정책관리자 2693 2014.11.06
237 한자어를 푸는 가장 편리한 열쇠는 ‘한자의 뜻’이다 어문정책관리자 2745 2014.11.06
236 每日新聞 독자위원회 "조간 전환 독자 의견도 실어줬으면" 어문정책관리자 2463 2014.11.06
235 초등학교 3학년 이상 교과서에 한자 병기 어문정책관리자 2556 2014.11.06
234 [발언대] 漢字 지식이 科學·창의력 이끈다 어문정책관리자 2500 2014.11.05
233 든든한 조언자로 늘 함께… 열심인 아이 곁엔 더 성실한 엄마가 있었다 어문정책관리자 2457 2014.11.03
232 <이유있는 주장> 한자(漢字)는 없다 원래 서글(書契)이었다 어문정책관리자 2704 2014.11.02
231 '한자'가 중국글(?)... 우리 민족 글인 것을! 어문정책관리자 2818 2014.11.02
230 가장 효율적인 교육투자는 일곱 살 이전의 漢字교육 어문정책관리자 2522 2014.11.01
229 [취재파일] 한자 문맹이 기자만의 탓인가? 어문정책관리자 2560 2014.11.01
[강상헌의 만史설문] 시해(弑害)와 살해 어문정책관리자 3078 2014.10.29
227 [광남시론]초등학교 교과서 한자 병기를 환영한다 어문정책관리자 2341 2014.10.29
226 김경수의 한자 이야기 우(雨) 어문정책관리자 2774 2014.10.29
225 한자 잃어버린 베트남도 '한자 부활' 움직임 어문정책관리자 3023 2014.10.28
224 방송통신대 프라임칼리지, 한자 오디세이' 강좌 개설 어문정책관리자 2387 2014.10.28
223 [한자 문맹(漢字文盲) 벗어나자] 6가원칙(육하원칙)·연류되다(연루.. 어문정책관리자 2857 2014.10.27
222 [팩트체크] 이름 지을 수 있는 한자 제한, 정당한가? 어문정책관리자 2443 2014.10.23
221 "취직하려면… 입문계가 좋아요? 시럽계가 좋아요?" 어문정책관리자 2641 2014.10.21
후원 : (사)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사)한국어문회 한자교육국민운동연합 (사)전통문화연구회 l 사무주관 : (사)전통문화연구회
CopyRight Since 2013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 All Rights Reserved.
110-707. 서울 종로구 낙원동 284-6 낙원빌딩 507호 (전통문화연구회 사무실 내) l 전화 : 02)762.8401 l 전송 : 02)747-0083 l 전자우편 : juntong@juntong.or.kr

CopyRight Since 2001-2011 WEBARTY.COM All Rights RESERVED. / Skin By Webar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