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어 = 중국어’는 오해(정인갑교수의 한자어산책)
동포타운신문 이동철기자. 2012.02.19.
한국어에는 한자어가 약 70% 정도 된다. 이를 한국인이 중국어를 배우는 데 꼭 유리하다고만 볼 수 없다. 한자어가 곧 중국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비록 같은 한자로 표기된 단어지만 중국어와 뜻이 다를 수도 있고, 용법상 틀릴 수도 있다.
1. 형태는 같아도 뜻이 다름. ‘道具’는 한자어는 일할 때 쓰는 연장, 이를테면 호미, 삽 등이다. 그러나 중국어에서 ‘道具’는 무대 장치나 연출에 쓰이는 물품, 이를테면 가짜 산, 가짜 총, 가짜 집 등만을 일컫는다. 한국어의 ‘도구’를 중국어에서는 ‘工具’라고 한다. ‘愛人’은 한자어에서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나 중국어로는 ‘법적인 배우자’, 즉 ‘처’나 ‘남편’이다. 중국어에서는 ‘애인’을 ‘情人’, ‘情夫’, ‘情婦’라고 말한다.
2. 긍정, 부정 혹은 중성 등 성격의 차이. 한자어에서 ‘景氣’는 중성, 즉 ‘경제상태’를 말한다. 상태가 좋으면 ‘호경기’ 혹은 ‘경기가 좋다’ 하고, 상태가 나쁘면 ‘불경기’ 혹은 ‘경기가 나쁘다’고 한다. 중국어의 ‘景氣’는 ‘상태가 좋다’는 뜻이다. 좋지 않을 때는 ‘不景氣’라 하지만 좋을 때는 그저 ‘景氣’라고 하면 되지 ‘景氣好’, ‘好景氣’라 하면 안 된다.
3. 포폄(褒貶)상의 차이. ‘遊說’를 한자어에서는 좋은 뜻으로 쓴다. 중국어에서 ‘遊說’는 나쁜 의미로, ‘돌아다니며 그럴듯한 말로 다른 사람을 꼬인다’는 뜻이다. 유명 정치인이 선거유세를 한다면 한국에서는 뜻이 통하지만 중국에서 그렇게 말하면 상대방을 모욕하는 오해를 빚어낸다. 중국어로 유세에 해당하는 말은 ‘演講’ 또는 ‘講演’이라고 해야 맞다.
4. 문법적 기능상의 차이. 한자어에서 ‘永遠’은 다양한 문법으로 쓸 수 있다. ‘영원토록 사랑하다’, ‘영원한 사랑’, ‘사랑은 영원하다’ 등 상황어, 관형어, 술어로 다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어에서는 ‘永遠’이 상황어로밖에 쓰이지 않는다. ‘他永遠在我人中(그는 영원토록 나의 마음속에 있다)’ 식이다. 영원이란 뜻을 관형어로 쓰려면 ‘永恒’으로 바꾸어 ‘永恒的愛情(영원한 사랑)’으로 해야 하고, 술어로 쓰려면 ‘愛情永久(애정은 영원하다)’로 해야 한다. 중국어에 ‘永遠的愛情’이나 ‘愛情永遠’이란 말은 없다. 위에 든 예 ‘景氣(명사, 한자어/형용사, 중국어)’도 이에 속한다.
5. 시대적 분기(分期) 차이. 중국어 어휘의 뜻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데 한자어의 의미도 중국어와 발을 맞추어 변한 것이 아니다. 중국어 ‘走’자에 ‘뛰다(고대 의미)’ ‘걷다(현대의미)’ 등 뜻이 있지만 한자어에는 ‘뛰다’의 의미밖에 없다. 한자어의 주행(走行), 분주(奔走), 질주(疾走), 도주(逃走) 등에서 ‘주(走)’는 다 뛰다의 뜻이다. 한자어에서 ‘주(走)’를 ‘걷다’의 뜻으로 쓴 예는 하나도 없다.
이상에서 보다시피 ‘한자어=중국어’라는 식의 인식은 큰 오해다. 필자의 통계에 따르면 고유명사를 제외하고 한자어와 같은 한자로 표기된 중국어가 완전히 일치한 예는 50%를 웃도는 정도밖에 안 된다. 한자어는 한국어이지 중국어가 아니라는 인식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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